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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사진 아카데미

집현전 특별 초청 강연

특별 초청 강연

배다리 시진갤러리 주최 성남훈 작가 초청 특별 강연회 - 2012.8.17(금) 7시

2012-08-15
조회수 11189


 
제목 : 족보 없는 집시가 떠돌다

일시 : 2012. 8. 17. 오후 7시

장소 : 플레이 캠퍼스 (인천기독병원 앞, 예지요양병원 주차장 옆 골목)

참가비 : 1만원

연락처 010-5400-0897, 070-4142-0897

 사진공간 배다리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씨를 초청하여 8월 17일 사진특강을 개최한다.
성남훈 사진가는 전 세계에 정치, 경제, 사회, 전쟁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유민들에 대하여 촬영하여 세계에 발표해 온 사진가이다.

1993년 루마니아 난민에 대한 사진작업을 시작으로 그는 다큐멘터리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이 작품으로 파리 그랑 팔레가 주최한 '르 살롱'전에서 사진부문 최우수상 수상 받게 된다.

이후 소록도 한센병 작업과 보스니아 내전, 르완단 난민 문제, 인도네시아 민주화 과정, 코소보 전쟁으로 인한 난민, 한국기아대책기구와 공동으로 에티오피아의 기아현실에 대한 사진작업 등 많은 작업을 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온 한국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다.

그는 1994년 다큐멘터리 집단인 프랑스 사진에이전시 ‘라포(Rapho)’의 소속 사진가로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97년부터 '라포 (rapho)'한국특파원으로 활동 중에 있으며 2012여수세계박람회 해외홍보용 사진화보집을 촬영했고 경기도 해외홍보용 사진화보집을 촬영하기도 했다.

현재는 사진 교육자로서 2006-2009년 전주대학교 사진학과 객원교수로 재직 했으며 2010년 이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강의 중에 있다.

한편 사진공간 배다리에서는 8월 10일부터 29일까지 개관기념 다큐멘터리 사진가 릴레이 전시기획으로 성남훈 사진전 ‘집시의 시간’이 전시되고 있다.

이번 특강 장소는 사진공간 ‘배다리’ 갤러리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문화공간 ‘플레이 캠퍼스’(인천기독병원 앞)에서 저녁 7시에 열린다.
참가비는 1만원이다.

연락처 010-5400-0897, 070-4142-0897 이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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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_attach_image1.jpg<작가노트>

파리 서쪽 외곽 낭테르의 루마니아 집시들과 만난 첫 날,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첫 이미지는 모닥불 앞에 서 있던 벙어리 집시 소녀였다. 소녀의 눈빛이 얼마나 강한지 카메라의 셔터 속도만큼이나 나의 가슴을 순식간 멈추게 했다. 떨리는 셔터의 움직임과 침묵 속의 교감은 운명과도 같이 나를 이들 속으로 빨려 들게 했다


나는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다큐멘터리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다. 91년 여름방학 중 프랑스 남부 아를르에서 열리는 “국제사진페스티발”을 구경간적 있었다. 매일 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원형경기장에서는 대형스크린에 음악과 잘 편집된 사진 영상 쇼가 이루어졌는데, 그중 어린이 암 병동 사진을 보고 벅찬 감동에 눈물을 흘렸다. 다큐멘터리사진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즉시 대학시절 연극 활동의 경험을 살려 패션사진을 전공하려 했던 마음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연극 활동 시절 후배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생일날, 남자 친구로부터 꽃을 선물 받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단다. 그래서 밤새 뜬눈으로 그 꽃을 찾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81학번인 나는 연극에 빠져 치열한 시대적 상황 속에 어떠한 저항도 해보지 않고 그 시기를 넘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지구촌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알리는 일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이렀듯 갈등의 시기에 이곳 집시들을 만났다. 안개 속을 헤매듯 이들에 대한 인류학적 식견도 전무했고, 이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기록 할 것인가의 구체적 사진 철학도 미비했다. 세계적인 사진가 집단인 ‘매그넘’의 사진가 조세프 쿠델카의 집시사진 만이 어른거릴 뿐, 부끄럽게도 긴 시간 이곳에서 다큐멘터리사진의 모든 것을 배워 나갔다. 하루는 쿠델카를, 하루는 브레송을, 하루는 살가도를 답습 하는 혼란 속에, 모든 것이 시작이었다. 다만 이방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열정만이 이들과의 공통 분모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옥죄어 오는 것은 내가 지금 찍고 있는 사진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내가 이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이었다


처음 이들을 사진에 옮기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한두 번 다녀간 사진 기자들이 언론 매체에 이들을 부정적으로 다루었고, 그로 인해 주변 주민들의 여론도 좋지 않아 사진에 대한 피해의식이 컸다

아직 서로의 신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집시들을 설득하기에는 “같은 이방인”이라는 논리로는 너무 허약하고 빈곤했다. 카메라 뒤에 숨어있는 빨리 이들을 찍고 싶은 본능적 욕망만이 꿈틀 거릴 뿐이다


며칠 후 방법을 바꾸어 개인적이면서 인간적인 접근을 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어른들 몰래 찍어 두었던 벙어리 집시 소녀의 사진을 11*14 인치의 크기로 인화하여 그녀의 부모에게 전달하고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그들의 켐핑카를 찾아 갔을 때 어머니는 갓 태어난 사내아이에게 수유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사진을 전달하자 놀라는 기색이었다. 혹시 내가 돈을 요구하지는 안을까 불안해했다. 사실 그녀는 이렇게 큰 사진을 처음 받아보는 듯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으로 작은 선물 이라고 하자 안심하는 눈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루마니아의 친척에게 보낼 사내아이의 사진을 찍어 줄 수 있느냐고 한다. 그것은 나의 절실한 바램 이자 새로운 관계를 맺는 신호였다. 이렇게 한 가정 한 가정을 설득하는 동안 나는 자연스레 이들의 기념사진 전문 사진가이자 친구가 되었다


여름이 다가올 무렵, 낭테르의 작은 집시 왕국은 자취를 감추었다. 주변 공장에 까지 피해를 주어 경찰에 의해 더 먼 외곽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수소문 끝에 그들의 정착지를 알 수가 있었다. 낭테르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 이상 떨어진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찾을 수 없는 벌판에 낭테르를 떠난 소수의 집시 가족만이 둥지를 틀었다.

어렵 살이 이곳에 도착한 나는 허허벌판을 야생마가 되어 뛰어 다니는 집시아이들을 보고선 심장이 멈춰 설듯 한 전율을 느꼈다. “이것이 집시구나, 이것이 바로 집시야” 라고 말이다. 아름다웠다.

이런 형용할 수 없는 자유가 이들의 피를 지배하고, 사랑을 지배하고, 영혼을 지배하는 구나 생각했다. 무엇을 더 바랠 것인가? 나는 아이들과 벌판과 풀과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하나가되어 뒹굴고 달리며 동화 같은 이들의 순수함을 카메라에 채워 나갔다. 그리고 행복했다. 이것은 그 동안 세상풍파에 사라진 듯 했던 이들의 가슴에 숨겨진 날것의 아름다움 이었다.

그리고 이 대지를 스치는 바람 같은 나의 여정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집시들을 만난 지 거의 일 년이 되는 92년 가을, 운명과도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 측의 배려로 파리에 있는 그랑팔레에서 열리는 “르 살롱” (르 살롱전은 프랑스 예술원이 주체하는 300여년의 전통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전에 집시사진 12장을 2차 심사를 거쳐 전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사진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 상은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진가로서의 길을 갈 수 있는 초석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93년 학교를 졸업 후, 파리에 있는 ‘매그넘’ 사무실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존경하는 사진가 조세프 쿠델카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에게 나의 비천한 집시사진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자 부끄러움 이었다. 그리고 그와의 가슴 설레는 만남은 30분가량 진행되었다. 대화의 핵심은 쿠델카의 집시사진과 나의 집시사진에서 느껴지는 감성과 정체성이 무엇 인가였다. 그는 “너의 사진 속에는 동양 색 짙은 서정성이 묻어난다.” 라고 말 했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중요한 시기인 만큼, 우리가 천재가 아닌 것에 실망하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재능의 살려 찍고 싶은 사진에 영혼을 불어 넣고 화두를 깊이 있게 심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위로하였다. 가능 하면 6개월 마나 한번 씩 만나 작업진행을 점검하자는 약속과 함께 헤어 졌다. (아쉽게도 나는 94년 세계적인 사진가 집단 ‘라포’의 사진가 로베르 드와노가 연명한 후 이곳의 소속 사진가 되어 동분서주하는 바람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눈이 번쩍 뜨였다. 나의 시야를 가린 안개가 겉치고 멀리 여명이 밀려왔다. 그리고 내 자신에 반문 해보았다. “그래, 이 집시 사진을 어떤 주제와 결합하여 어떻게 확장 시키고 심화 시킬 수 있을까? ” 그 해답은 정치, 사회, 경제, 전쟁 등으로 본인의 의지가 아닌 상황에서 자신의 둥지를 떠날 수밖에 없는, 현대판 집시인 유민들의 아픔을 대륙 별로 찾아 기록하고 알리는 것 이었다.

“라 비 드 보헴”(집시의 나날)이라 불리던 낭만의 시대 이 후 고통으로 점철된 집시들의 여정처럼 나 또한 족보 없는 집시가 되어 슬픈 유민들의 여정을 따라나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