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점자도서관 시각장애인 사진동아리 '일상을 담다' 사진전
(시각장애인 6인의 릴레이 전시)
'시선너머의 기록'
_'마음으로 담아낸 개념예술의 변주'_
1전시 이현정 황월분(9.01~9.06)
2전시 박희미, 이미정(9.08~9.13)
3전시 김동철, 박윤서(9.15~9.20)
Art & Book Space 집현전 3층
(open 12:00 ~ 18:00)

시선 너머의 기록
-마음으로 담아낸 개념예술의 변주-
기획자 이상봉
사진(Photography)은 본래 빛을 담아내는 일이며, 철저히 시각에 의존하는 예술 매체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시력을 잃은 이들에게 사진은 영영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일까요? 저는 '일상을 담다'라는 사진 강좌를 통해 시각장애인 작가들과 함께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의 아름다움을 좇는 전통적인 사진의 문법을 과감히 내려놓고, '개념예술(Conceptual Art)'이라는 새로운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1960년대에 등장한 개념예술은 시각적인 결과물보다 예술가가 세운 '아이디어(개념)'와 그것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 자체를 가장 중요한 예술로 삼습니다. 이번 전시는 세계적인 개념예술가 소피 칼(Sophie Calle)이 보여주었던 ‘흔적’과 ‘부재’, 그리고 ‘수행’의 서사를, 시각장애인 작가들이 자신들만의 감각과 방식으로 새롭게 변주해 낸 결과물입니다.
총 세 팀으로 구성된 이번 작업에서, 전맹과 저시력(약시) 작가들은 한 조를 이루어 서로의 눈과 마음이 되어주는 철저한 협업의 규칙을 수행했습니다.
첫 번째 전시팀인 이현정과 황월분은 소피 칼의 '뉴욕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소피 칼이 소설가 폴 오스터의 지시에 따라 뉴욕의 일상을 수행하고 기록했듯, 이들은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하여 얻어낸 10개의 지시어를 수행하는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두 번째 전시팀인 박희미와 이미정은 누군가 남기고 간 '기억의 흔적'을 수집했습니다. 타인이 머물다 간 방을 살피며 삶을 추리했던 소피 칼의 ‘호텔(L'Hotel)’처럼, 이들은 보이지 않거나 흐릿해져 가는 대상 속에서 부재하는 존재들을 증명해 냅니다.
세 번째 전시팀인 김동철과 박윤서는 송림동 재개발 지역이라는 상실과 폐허의 공간을 무대로 삼았습니다. 철거를 앞둔 텅 빈 골목길에서, 두 작가는 부서진 잔해가 아니라 그곳에 짙게 배어있는 ‘서민들의 따뜻한 시간과 온기’를 사유해 내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단순한 풍경의 재현이 아닙니다. 이들은 스스로 작업의 개념을 설정하고, 한계라 여겨졌던 시력의 빈자리를 오히려 이웃의 삶에 더 깊이 가닿는 따뜻한 연결 고리로 삼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카메라를 낯설어하던 이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흔적을 쫓는 진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기획자로서 이들의 눈부신 여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실로 가슴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이 아닌 마음으로 세상을 담아낼 때, 카메라는 대상을 소유하는 도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간을 붙잡는 사유의 도구가 됩니다. 세 팀의 작가들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개념예술의 변주를 통해, 관람객 여러분께서도 잠시 눈을 감고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진 삶의 깊은 흔적을 마음으로 더듬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현정
<감각의 내비게이션>
소피 칼의 '뉴욕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소피 칼이 소설가 폴 오스터의 지시에 따라 뉴욕의 일상을 수행하고 기록했듯, 이현정은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하여 얻어낸 10개의 지시어를 수행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1. 감각의 내비게이션 첫 번째 과제 ' 따뜻함’
<AI의 지시>
오늘 가장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장소를 찾으세요.
그곳에 3분 동안 머문 뒤 사진을 찍으세요.
사진을 찍기 전에 손바닥을 한 번 펼쳤다가 쥐어 보세요.
<이현정 기록>
26년 5월 31일
1. 따뜻함
나는 가장 따뜻한 장소로 성당을 선택했다. (항상 나를 위해 수고하는 활동지원사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약속 장소는 아파트 1층 현관이었다. 그녀는 미리 와 있었고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기도 전에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는 계단 앞에서는 걸음을 멈췄고 턱이 나오면 허리를 굽혀 내 발을 보았다. 건널목에서는 손에 힘을 주고 나를 자신의 몸쪽으로 약간 당겼다. 좁은 길에서는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을 계속 피하게 했다.
15분 정도를 걸어 성당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3분을 머물렀고 손바닥을 펼쳤다가 쥐어 보았다. 거기에는 그녀 손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나는 성당 사진을 찍지 않았다.
따뜻함은 성당 안에 있지 않았다.
성당까지 오는 길 위에 있었다.
황월분
<일상의 늦바탕을 꿰다>
황월분의 작업은 이현정과 한 팀으로 작업하였다. 소피 칼의 '뉴욕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소피 칼이 소설가 폴 오스터의 지시에 따라 뉴욕의 일상을 수행하고 기록했듯,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하여 얻어낸 10개의 지시어를 수행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흔적
나는 흔적을 찾으러 길을 나선다.
발길이 멈춘 곳은 수도사업공원이다
거기에 뇌 건강 학교가 있어 게임하러 온 연로한 분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선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공원을 걸어 오래된 그루터기를 발견하여 사진을 찍는다.
그 속엔 얼마나 많은 흔적이 있을까?
더듬어본다.
까치를 비롯한 많은 새,
더위와 추위,
그 나무 아래서 나름의 기쁘고 슬픈 이야기 들으며 잠잠히 지나온 세월은
우리의 년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엔 말 못 하는 사연들이 뿌리 깊이 묻힌 채
오늘 밤에도 내일 찾아올 태양을 기다리고 있다
박희미
<남겨진 흔적>
누군가 남기고 간 '기억의 흔적'을 수집했다. 타인이 머물다 간 방을 살피며 삶을 추리했던 소피 칼의 ‘호텔(L'Hotel)’처럼, 이들은 보이지 않거나 흐릿해져 가는 대상 속에서 부재하는 존재들을 증명했다. 
서랍속의 사랑
남편의 옷장 깊숙한 곳,
그곳에는 나와 아이들 세례복과 성화가 놓여 있다.
신앙이 없는 그가
우리의 추억과 신념이 밴 물건들을
이토록 소중하게 품고 있었을 줄이야.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 오래된 흔적들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나는 침묵 속에 담긴 그의 짙은 사랑을
마음의 눈으로 다시 써 내려간다.
이미정
<시간을 잇는 흔적>
이미정과 박희미는 누군가 남기고 간 '기억의 흔적'을 수집했다. 타인이 머물다 간 방을 살피며 삶을 추리했던 소피 칼의 ‘호텔(L'Hotel)’처럼, 이들은 보이지 않거나 흐릿해져 가는 대상 속에서 부재하는 존재들을 증명했다.
부모님의 약혼사진
흘러간 시간 속에 애틋한 젊은 시절.
이젠 손을 잡아볼 순 없지만
그리움과 좋은 추억만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넘어,
세월의 흔적들이 자꾸 그리워
여기, 지금의 시간으로 다시 불러봅니다.
엄마, 참 많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해요
김동철
<잊혀져 가는 시간 그러나 영원히 남을 기억의 페이지>
송림동 재개발 지역이라는 상실과 폐허의 공간을 무대로 삼았다. 철거를 앞둔 텅 빈 골목길에서, 두 작가는 부서진 잔해가 아니라 그곳에 짙게 배어있는 ‘서민들의 따뜻한 시간과 온기’를 사유해 내는 과정을 기록했다.

기억의 파편들
기억의 파편들이 여기 모여 앉아 있다.
고단한 하루를 떠받쳐 주던 낡은 의자는 다리가 부러진 채 잠들었고, 생명처럼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던 호스는 먼지 쌓인 잡동사니 속에 한 토막으로 남았다. 가파른 언덕길의 숨가쁨을 달래주던 아이스크림 껍질도 널브러져 있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시간은 골목을 서성인다. 사람의 목소리가 멎은 자리, 침묵이 그들을 대신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폐허는 결코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남겨진 사물들은 저마다 수다쟁이가 되어, 사랑했던 날들과 눈물 흘리던 밤, 가난했지만 서로를 웃게 했던 계절을 말없이 꺼내놓는다.
나는 오늘도 그 소리 없는 수다를 들으러 이곳을 걷는다. 한 줄기 햇살이 비추면, 텅 빈 골목은 마치 아무도 떠나지 않은 듯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고 있다.
박윤서
<사람이 떠난 자리, 사물을 읽다>
박윤서 김동철은 팀작업으로 진행하였다. 저시력인 박윤서가 눈에 보이는 풍경과 사물의 파편들을 설명하면, 김동철은 가만히 그 장소의 공기를 느끼며 마음에 닿는 주제를 골라냈다. 낡은 건물 외벽이나 쓸모를 다한 물건들 속에서 그가 ‘이거다’ 하고 방향을 정해주면, 나는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지시하는 구도대로 셔터를 눌렀다. 그가 의식되는 흔적을 찾아낼 때까지 텅 빈 재개발 마을의 골목을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낡고 녹슬어 버린 우체통
우두커니 벽에 매달려 있었다.
녹슬어 버린 지 오래다.
그 빛나던 시절을 잊은 채 벽에 착 달라붙어 버렸다.
우체부 아저씨들의 손길이 멀어지자 반질거렸던 우체통도 숨쉬기를 마다했다.
그 시간이 기억을 해주고 있으니 너무 슬퍼 말아라 널 평생 기다리던 엄마의 마음도 너의 품속에는 남아 있단다.
이 전시는 송암점자도서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그리고 어반스케처 이웃 김인근님과 박수희님의 지원과 후원을 받았습니다.
송암점자도서관 시각장애인 사진동아리 '일상을 담다' 사진전
(시각장애인 6인의 릴레이 전시)
'시선너머의 기록'
_'마음으로 담아낸 개념예술의 변주'_
1전시 이현정 황월분(9.01~9.06)
2전시 박희미, 이미정(9.08~9.13)
3전시 김동철, 박윤서(9.15~9.20)
Art & Book Space 집현전 3층
(open 12:00 ~ 18:00)
시선 너머의 기록
-마음으로 담아낸 개념예술의 변주-
기획자 이상봉
사진(Photography)은 본래 빛을 담아내는 일이며, 철저히 시각에 의존하는 예술 매체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시력을 잃은 이들에게 사진은 영영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일까요? 저는 '일상을 담다'라는 사진 강좌를 통해 시각장애인 작가들과 함께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의 아름다움을 좇는 전통적인 사진의 문법을 과감히 내려놓고, '개념예술(Conceptual Art)'이라는 새로운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1960년대에 등장한 개념예술은 시각적인 결과물보다 예술가가 세운 '아이디어(개념)'와 그것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 자체를 가장 중요한 예술로 삼습니다. 이번 전시는 세계적인 개념예술가 소피 칼(Sophie Calle)이 보여주었던 ‘흔적’과 ‘부재’, 그리고 ‘수행’의 서사를, 시각장애인 작가들이 자신들만의 감각과 방식으로 새롭게 변주해 낸 결과물입니다.
총 세 팀으로 구성된 이번 작업에서, 전맹과 저시력(약시) 작가들은 한 조를 이루어 서로의 눈과 마음이 되어주는 철저한 협업의 규칙을 수행했습니다.
첫 번째 전시팀인 이현정과 황월분은 소피 칼의 '뉴욕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소피 칼이 소설가 폴 오스터의 지시에 따라 뉴욕의 일상을 수행하고 기록했듯, 이들은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하여 얻어낸 10개의 지시어를 수행하는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두 번째 전시팀인 박희미와 이미정은 누군가 남기고 간 '기억의 흔적'을 수집했습니다. 타인이 머물다 간 방을 살피며 삶을 추리했던 소피 칼의 ‘호텔(L'Hotel)’처럼, 이들은 보이지 않거나 흐릿해져 가는 대상 속에서 부재하는 존재들을 증명해 냅니다.
세 번째 전시팀인 김동철과 박윤서는 송림동 재개발 지역이라는 상실과 폐허의 공간을 무대로 삼았습니다. 철거를 앞둔 텅 빈 골목길에서, 두 작가는 부서진 잔해가 아니라 그곳에 짙게 배어있는 ‘서민들의 따뜻한 시간과 온기’를 사유해 내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단순한 풍경의 재현이 아닙니다. 이들은 스스로 작업의 개념을 설정하고, 한계라 여겨졌던 시력의 빈자리를 오히려 이웃의 삶에 더 깊이 가닿는 따뜻한 연결 고리로 삼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카메라를 낯설어하던 이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흔적을 쫓는 진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기획자로서 이들의 눈부신 여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실로 가슴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이 아닌 마음으로 세상을 담아낼 때, 카메라는 대상을 소유하는 도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간을 붙잡는 사유의 도구가 됩니다. 세 팀의 작가들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개념예술의 변주를 통해, 관람객 여러분께서도 잠시 눈을 감고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진 삶의 깊은 흔적을 마음으로 더듬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현정
<감각의 내비게이션>
소피 칼의 '뉴욕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소피 칼이 소설가 폴 오스터의 지시에 따라 뉴욕의 일상을 수행하고 기록했듯, 이현정은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하여 얻어낸 10개의 지시어를 수행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1. 감각의 내비게이션 첫 번째 과제 ' 따뜻함’
<AI의 지시>
오늘 가장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장소를 찾으세요.
그곳에 3분 동안 머문 뒤 사진을 찍으세요.
사진을 찍기 전에 손바닥을 한 번 펼쳤다가 쥐어 보세요.
<이현정 기록>
26년 5월 31일
1. 따뜻함
나는 가장 따뜻한 장소로 성당을 선택했다. (항상 나를 위해 수고하는 활동지원사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약속 장소는 아파트 1층 현관이었다. 그녀는 미리 와 있었고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기도 전에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는 계단 앞에서는 걸음을 멈췄고 턱이 나오면 허리를 굽혀 내 발을 보았다. 건널목에서는 손에 힘을 주고 나를 자신의 몸쪽으로 약간 당겼다. 좁은 길에서는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을 계속 피하게 했다.
15분 정도를 걸어 성당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3분을 머물렀고 손바닥을 펼쳤다가 쥐어 보았다. 거기에는 그녀 손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나는 성당 사진을 찍지 않았다.
따뜻함은 성당 안에 있지 않았다.
성당까지 오는 길 위에 있었다.
황월분
<일상의 늦바탕을 꿰다>
황월분의 작업은 이현정과 한 팀으로 작업하였다. 소피 칼의 '뉴욕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소피 칼이 소설가 폴 오스터의 지시에 따라 뉴욕의 일상을 수행하고 기록했듯,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하여 얻어낸 10개의 지시어를 수행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흔적
나는 흔적을 찾으러 길을 나선다.
발길이 멈춘 곳은 수도사업공원이다
거기에 뇌 건강 학교가 있어 게임하러 온 연로한 분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선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공원을 걸어 오래된 그루터기를 발견하여 사진을 찍는다.
그 속엔 얼마나 많은 흔적이 있을까?
더듬어본다.
까치를 비롯한 많은 새,
더위와 추위,
그 나무 아래서 나름의 기쁘고 슬픈 이야기 들으며 잠잠히 지나온 세월은
우리의 년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엔 말 못 하는 사연들이 뿌리 깊이 묻힌 채
오늘 밤에도 내일 찾아올 태양을 기다리고 있다
박희미
<남겨진 흔적>
누군가 남기고 간 '기억의 흔적'을 수집했다. 타인이 머물다 간 방을 살피며 삶을 추리했던 소피 칼의 ‘호텔(L'Hotel)’처럼, 이들은 보이지 않거나 흐릿해져 가는 대상 속에서 부재하는 존재들을 증명했다.
서랍속의 사랑
남편의 옷장 깊숙한 곳,
그곳에는 나와 아이들 세례복과 성화가 놓여 있다.
신앙이 없는 그가
우리의 추억과 신념이 밴 물건들을
이토록 소중하게 품고 있었을 줄이야.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 오래된 흔적들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나는 침묵 속에 담긴 그의 짙은 사랑을
마음의 눈으로 다시 써 내려간다.
이미정
<시간을 잇는 흔적>
이미정과 박희미는 누군가 남기고 간 '기억의 흔적'을 수집했다. 타인이 머물다 간 방을 살피며 삶을 추리했던 소피 칼의 ‘호텔(L'Hotel)’처럼, 이들은 보이지 않거나 흐릿해져 가는 대상 속에서 부재하는 존재들을 증명했다.
부모님의 약혼사진
흘러간 시간 속에 애틋한 젊은 시절.
이젠 손을 잡아볼 순 없지만
그리움과 좋은 추억만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넘어,
세월의 흔적들이 자꾸 그리워
여기, 지금의 시간으로 다시 불러봅니다.
엄마, 참 많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해요
김동철
<잊혀져 가는 시간 그러나 영원히 남을 기억의 페이지>
송림동 재개발 지역이라는 상실과 폐허의 공간을 무대로 삼았다. 철거를 앞둔 텅 빈 골목길에서, 두 작가는 부서진 잔해가 아니라 그곳에 짙게 배어있는 ‘서민들의 따뜻한 시간과 온기’를 사유해 내는 과정을 기록했다.
기억의 파편들
기억의 파편들이 여기 모여 앉아 있다.
고단한 하루를 떠받쳐 주던 낡은 의자는 다리가 부러진 채 잠들었고, 생명처럼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던 호스는 먼지 쌓인 잡동사니 속에 한 토막으로 남았다. 가파른 언덕길의 숨가쁨을 달래주던 아이스크림 껍질도 널브러져 있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시간은 골목을 서성인다. 사람의 목소리가 멎은 자리, 침묵이 그들을 대신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폐허는 결코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남겨진 사물들은 저마다 수다쟁이가 되어, 사랑했던 날들과 눈물 흘리던 밤, 가난했지만 서로를 웃게 했던 계절을 말없이 꺼내놓는다.
나는 오늘도 그 소리 없는 수다를 들으러 이곳을 걷는다. 한 줄기 햇살이 비추면, 텅 빈 골목은 마치 아무도 떠나지 않은 듯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고 있다.
박윤서
<사람이 떠난 자리, 사물을 읽다>
박윤서 김동철은 팀작업으로 진행하였다. 저시력인 박윤서가 눈에 보이는 풍경과 사물의 파편들을 설명하면, 김동철은 가만히 그 장소의 공기를 느끼며 마음에 닿는 주제를 골라냈다. 낡은 건물 외벽이나 쓸모를 다한 물건들 속에서 그가 ‘이거다’ 하고 방향을 정해주면, 나는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지시하는 구도대로 셔터를 눌렀다. 그가 의식되는 흔적을 찾아낼 때까지 텅 빈 재개발 마을의 골목을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낡고 녹슬어 버린 우체통
우두커니 벽에 매달려 있었다.
녹슬어 버린 지 오래다.
그 빛나던 시절을 잊은 채 벽에 착 달라붙어 버렸다.
우체부 아저씨들의 손길이 멀어지자 반질거렸던 우체통도 숨쉬기를 마다했다.
그 시간이 기억을 해주고 있으니 너무 슬퍼 말아라 널 평생 기다리던 엄마의 마음도 너의 품속에는 남아 있단다.
이 전시는 송암점자도서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그리고 어반스케처 이웃 김인근님과 박수희님의 지원과 후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