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간 배다리 2016 포트폴리오 3기 최우수작가 초대 전시
홍성희 사진전
'바다에'
2017. 9. 19 ~ 10. 1
사진공간 배다리 2관 차이나타운 전시관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3가 9-6번지 (카페 헤이루체)
오픈식 : 2017. 9. 19. 오후 6:30

<작가노트>
바다에
홍성희
힐링을 위해 현대인들은 푸른 바다를 찾아간다. 그리고 섬도 찾아간다.
아마도 바다란 엄마의 품과 같기에 엄마의 품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닐까?
섬은 외롭게 서 있지만 바다의 잔잔함과 너그러움을 함께 하고 있다.
섬은 고독한 존재 같지만 그 안에는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세계가 있다.
인간에게 주는 고마움을 4계절 내내 모두 주고 있기에 나는 바다를 좋아하고 찾는다.
그러한 바다가 화가 날 때는 바람과 폭풍, 파도로 모든 것을 삼켜 버리지만 엄마의 품 같은 바다로 돌아올 때는 아낌없이 감싸주고 나를 힐링 시킨다.
육지에서 태어난 나로서는 파도가 출렁이는 곳에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간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다.
바다위에 떠 있는 등대를 길잡이로 섬으로 가는 길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한다.
밀물과 썰물로 인하여 갯벌이 보였다 숨었다를 반복하며 태초의 신비를 보여 주는 것도 내 가슴을 벅차게 하는데 충분하다.
나는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주관한 인천의 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천 프로젝트 ‘섬마을이야기’에 2년 간 참여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매달 한 개 이상의 섬을 답사하여 섬을 촬영하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진인들은 전국 여러 곳에서 참여하였다. 나는 덕분에 전국의 사진인들과 섬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기도 했다.
내가 본 지금의 섬들은 심각하게 노령화 되어 가고 있다.
허물어 가는 가옥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었고, 학교는 대부분 폐교화 되어 빈 교실과 터만 남아 있는 실정이었다.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구도 아주 적었다. NLL과 같이 안보와 관련 된 섬도 있고, 대부분의 섬 마을에서 젊은 사람을 보기란 어렵다.
미래의 섬 주인이 될 어린아이들을 보기는 더욱 힘들었다. 안타깝게도 섬은 이와 같이 텅 비어가고 있었다.
반면 섬을 찾는 관광객은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관광객들은 섬을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을 찾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섬을 지키고 있는 어르신들의 후덕한 인심처럼 섬의 모습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몇 년 전 페루의 바다에서 파도를 만났다. 내가 타고 있던 배는 파도에 기우뚱하며 균형을 잃었다.
그 속에 있던 나는 배의 흔들림에 나의 몸은 하늘로 부양하다 배 갑판 위로 여지없이 떨어졌다.
그렇게 하여 요추하나에 골절을 입는 선물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와 척추 수술을 받았고 척추에는 8개의 이물질이 자리를 잡았다.
하반신 마비가 될 수 있는 사고였으나 감사하게도 어려운 고비 고비를 잘 넘기고 지금은 잘 다니고 있다.
그런 사고 후에도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고 이번 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무척이나 행복해 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바다 건너 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섬 속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 해 본다.
이곳에서 나는 육지의 사람들이 섬을 바라보며 힐링하는 모습을 작가적 시각에서 나의 관점을 찾아보는 작업을 하였다.
나는 오늘도 행복을 찾아 바다로, 섬으로 사진 작업을 떠난다.
------
<서평>
<바다에>
홍성희의 <바다에>사진은 어디선가 본 듯 하지만, 말로는 다 하지 못하는 분위기,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도,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이다. 누군가는 익숙하지만 낯선 분위기는 언어의 타락이라 했지만, 사진 이미지는 모든 낯선 것들을 익숙함으로 정착시키는 ‘계시’와 ‘구원’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언어가 타락시킨 모든 자연적인 것을 되돌려주는 사진 이미지는 언어가 만든 상징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이미지는 언어와 달리 본질적으로 근원적인 것에 대한 동경, 잃어버린 것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이다.
홍성희의 <바다에>장면들이 익숙하지만 낯선,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머뭇거리는 상태를 자아내는 이상한 분위기들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 안에 이미지가 꿈을 꾸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것은 관습화 되지 않은 프레임, 뻔한 사진적 대상들의 그 흔한 바다 풍경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습은 언어에 길들여진 습관들이 만든 성(바벨탑)이다. “바다 에…”라는 말 앞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바다의 개념을 상기하고 연관된 의미들을 엮어서 그것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부여한다. 마치 잘 찍은 바다를 보면 저절로 바다를 본 것처럼, 착각하듯이, 이미지를 습관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진짜 이미지의 숨통을 끊어 놓은 줄을 모른다. 그래서 바다를 객관적 표상의 정보로 재현하는 많은 사진들은 상투적이다.
홍성희의 사진은 바로 이런 상투적인 바다사진들과 다르다. 그녀가 구사한 정방형의 프레임은 의도적으로 풍경을 절단하고 장면의 사태를 시선의 경계 밖으로 밀어낸다. 낮은 ‘피사계 심도’는 앞 뒤 공간을 흐려 대상에 시선이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결과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은 그 자체로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진들과 연결되도록 배치된다. <바다에>사진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된다. 어디선가 경험한 듯 하지만,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또 입에서 맴돌지만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실어증에 걸린 듯, 자꾸만 대상을 물꾸러미 바라보게 만드는 이유다.
말하자면, 홍성희 사진은 ‘말 줄임표’ 같은 것이다. 못다한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잠시 시선을 멈춘 것 같은 그런 상태 말이다. 말하고 싶은 데 정작 말하고 나면 공허해질 것 같은 그런 장면들이다. 사진은 장면을 사태로 전환한다. 사태는 사건을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는 항상 하나가 아니다. 홍성희의 사진 속 장면이 사태로 전화해서 우리들에게 도달하는 메시지들은 관객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추적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과 장면 속 대상들을 하나, 하나 구구절절 사연들로 엮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없는 이야기다. 그 의미들은 미지의 종결되지 않은 사건으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추측과 상상력으로 채워져야만 하는 기다리는 이미지, 미완의 이야기들인 것이다.
글: 이영욱(상명대 사진과 외래교수)






사진공간 배다리 2016 포트폴리오 3기 최우수작가 초대 전시
홍성희 사진전
'바다에'
2017. 9. 19 ~ 10. 1
사진공간 배다리 2관 차이나타운 전시관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3가 9-6번지 (카페 헤이루체)
오픈식 : 2017. 9. 19. 오후 6:30
<작가노트>
바다에
홍성희
힐링을 위해 현대인들은 푸른 바다를 찾아간다. 그리고 섬도 찾아간다.
아마도 바다란 엄마의 품과 같기에 엄마의 품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닐까?
섬은 외롭게 서 있지만 바다의 잔잔함과 너그러움을 함께 하고 있다.
섬은 고독한 존재 같지만 그 안에는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세계가 있다.
인간에게 주는 고마움을 4계절 내내 모두 주고 있기에 나는 바다를 좋아하고 찾는다.
그러한 바다가 화가 날 때는 바람과 폭풍, 파도로 모든 것을 삼켜 버리지만 엄마의 품 같은 바다로 돌아올 때는 아낌없이 감싸주고 나를 힐링 시킨다.
육지에서 태어난 나로서는 파도가 출렁이는 곳에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간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다.
바다위에 떠 있는 등대를 길잡이로 섬으로 가는 길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한다.
밀물과 썰물로 인하여 갯벌이 보였다 숨었다를 반복하며 태초의 신비를 보여 주는 것도 내 가슴을 벅차게 하는데 충분하다.
나는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주관한 인천의 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천 프로젝트 ‘섬마을이야기’에 2년 간 참여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매달 한 개 이상의 섬을 답사하여 섬을 촬영하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진인들은 전국 여러 곳에서 참여하였다. 나는 덕분에 전국의 사진인들과 섬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기도 했다.
내가 본 지금의 섬들은 심각하게 노령화 되어 가고 있다.
허물어 가는 가옥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었고, 학교는 대부분 폐교화 되어 빈 교실과 터만 남아 있는 실정이었다.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구도 아주 적었다. NLL과 같이 안보와 관련 된 섬도 있고, 대부분의 섬 마을에서 젊은 사람을 보기란 어렵다.
미래의 섬 주인이 될 어린아이들을 보기는 더욱 힘들었다. 안타깝게도 섬은 이와 같이 텅 비어가고 있었다.
반면 섬을 찾는 관광객은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관광객들은 섬을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을 찾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섬을 지키고 있는 어르신들의 후덕한 인심처럼 섬의 모습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몇 년 전 페루의 바다에서 파도를 만났다. 내가 타고 있던 배는 파도에 기우뚱하며 균형을 잃었다.
그 속에 있던 나는 배의 흔들림에 나의 몸은 하늘로 부양하다 배 갑판 위로 여지없이 떨어졌다.
그렇게 하여 요추하나에 골절을 입는 선물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와 척추 수술을 받았고 척추에는 8개의 이물질이 자리를 잡았다.
하반신 마비가 될 수 있는 사고였으나 감사하게도 어려운 고비 고비를 잘 넘기고 지금은 잘 다니고 있다.
그런 사고 후에도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고 이번 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무척이나 행복해 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바다 건너 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섬 속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 해 본다.
이곳에서 나는 육지의 사람들이 섬을 바라보며 힐링하는 모습을 작가적 시각에서 나의 관점을 찾아보는 작업을 하였다.
나는 오늘도 행복을 찾아 바다로, 섬으로 사진 작업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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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바다에>
홍성희의 <바다에>사진은 어디선가 본 듯 하지만, 말로는 다 하지 못하는 분위기,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도,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이다. 누군가는 익숙하지만 낯선 분위기는 언어의 타락이라 했지만, 사진 이미지는 모든 낯선 것들을 익숙함으로 정착시키는 ‘계시’와 ‘구원’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언어가 타락시킨 모든 자연적인 것을 되돌려주는 사진 이미지는 언어가 만든 상징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이미지는 언어와 달리 본질적으로 근원적인 것에 대한 동경, 잃어버린 것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이다.
홍성희의 <바다에>장면들이 익숙하지만 낯선,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머뭇거리는 상태를 자아내는 이상한 분위기들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 안에 이미지가 꿈을 꾸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것은 관습화 되지 않은 프레임, 뻔한 사진적 대상들의 그 흔한 바다 풍경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습은 언어에 길들여진 습관들이 만든 성(바벨탑)이다. “바다 에…”라는 말 앞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바다의 개념을 상기하고 연관된 의미들을 엮어서 그것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부여한다. 마치 잘 찍은 바다를 보면 저절로 바다를 본 것처럼, 착각하듯이, 이미지를 습관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진짜 이미지의 숨통을 끊어 놓은 줄을 모른다. 그래서 바다를 객관적 표상의 정보로 재현하는 많은 사진들은 상투적이다.
홍성희의 사진은 바로 이런 상투적인 바다사진들과 다르다. 그녀가 구사한 정방형의 프레임은 의도적으로 풍경을 절단하고 장면의 사태를 시선의 경계 밖으로 밀어낸다. 낮은 ‘피사계 심도’는 앞 뒤 공간을 흐려 대상에 시선이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결과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은 그 자체로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진들과 연결되도록 배치된다. <바다에>사진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된다. 어디선가 경험한 듯 하지만,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또 입에서 맴돌지만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실어증에 걸린 듯, 자꾸만 대상을 물꾸러미 바라보게 만드는 이유다.
말하자면, 홍성희 사진은 ‘말 줄임표’ 같은 것이다. 못다한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잠시 시선을 멈춘 것 같은 그런 상태 말이다. 말하고 싶은 데 정작 말하고 나면 공허해질 것 같은 그런 장면들이다. 사진은 장면을 사태로 전환한다. 사태는 사건을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는 항상 하나가 아니다. 홍성희의 사진 속 장면이 사태로 전화해서 우리들에게 도달하는 메시지들은 관객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추적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과 장면 속 대상들을 하나, 하나 구구절절 사연들로 엮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없는 이야기다. 그 의미들은 미지의 종결되지 않은 사건으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추측과 상상력으로 채워져야만 하는 기다리는 이미지, 미완의 이야기들인 것이다.
글: 이영욱(상명대 사진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