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준사진전
‘사진유희’
2016.8.12 ~ 8.30
작가와의 만남 : 2016. 8. 13 오후 3시
(사진공간 배다리 배다리전시관)

<작가노트>
현실에 숨어있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이미지
사진가가 촬영할 사물을 선택하는 것은 촬영대상인 사물을 만나야 되는데, 그 사물을 사진가는 기록하고자 하지만, 미술가는 그리려 하며, 어떤 이는 사색하고, 어떤 이는 놀이하며 즐기려고 한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사진작업은 촬영대상인 사물의 모습을 보이는 대로 기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본다’는 행위로 대상을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지만 그 대상을 기록한 사진이미지를 볼 때에는 보는 이의 시각이나 코드에 따라 현실이나 의미, 촬영기법 등에 대하여 여러모로 사유하고 해석하며 논쟁을 벌이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사진작품을 보면서 화가의 그림을 보듯 사진작품만 보지 않고 촬영된 대상을 떠올리며 의미를 찾고 해석하며 논쟁을 하게 될까? 사진의 특성상, 스스로의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회화나 음악과는 달리 사물을 찍어야 작품이 이루어짐으로 언제나 사물이라는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상의 실체와 사진을 비교분석하는 관계로 논쟁이 발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논쟁에 의문을 품으며 ‘본다’는 행위를 통해 형성된 우리의 시각적 고정관념으로 기록하는 촬영방법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방법으로 화가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카메라를 붓처럼 움직여 사진을 그려보기로 했다.
‘본다’는 행위로 보이는 대상의 모습을 촬영하였지만 카메라를 붓처럼 움직여 기록하니 사진에는 ‘본다’는 행위로 보이던 대상은 보이지 않고 그 대상에 숨어있던 전혀 새로운 그림의 사진이 찍혔다. “사진[寫眞]이란 물체의 상을 있는 그대로 박아 낸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할 때[학습백과사전], 카메라를 움직여 사물모습 속에 숨어있던 그림을 찍은 사진을 사진이라고 해도 되는지? 혼란스러워 의문도 들었지만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임으로 사진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사진과 달리 대상을 볼 때의 사물모습 속에 숨어있던 새로운 이미지라, 볼 때의 사물모습이 촬영된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임으로 어느 것이 본질이고, 현상이고, 가상인지, 헷갈렸지만, 눈으로 본 사물보다 숨어있다 촬영된 사진이미지가 더 본질이지 않을까? 의문을 품으며 눈으로 본 사물보다 더 본질 같은 사진을 찍고자 노력하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사진들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는 이미지로, 또한 사진공간속에서 회화이미지로 볼 수 있는 주관적인 사진으로, 타인들과 교감할 수 있고 보편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대인의 생활에 꼭 필요한 디지털카메라 시대에 사진공간의 작업영역을 더 넓힐 수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며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부터 이와 같은 작업을 계속하면서 기존관념에 사로잡혀있는 사진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 이 사진들은 촬영대상인 사물들을 보면서 촬영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있던 이미지임으로 이미지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사유하는 분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이환준
<서평>
사진은 비정형 유희공간이다.
이환준의 사진은 사진 같지 않은 사진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사진적인 이미지다. 그의 사진들의 특징들은 어떤 대상을 찍었지만 그 대상의 객관적 재현으로서의 의미나 구체적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회화작품처럼 추상적이다. 따라서 촬영된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그 알 수 없는 영역은 우리의 지각경험을 벗어나 있기에 매우 신비롭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만약 그 제작과정을 알게 되면 화가가 그린 추상회화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친 무엇이라 규정하기 불가능한 비정형의 이미지다.
추상회화의 시각적인 모든 것들은 화가의 의도적 산물이다. 하지만 사진의 경우 추상적 형태는 대상 자체가 이미 추상적이거나 카메라장치가 만들어내는 기술적 효과에 있다. 그것은 사진가의 의도의 산물이 아니다. 이환준의 사진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카메라 장치의 움직임과 대상이 발산하는 빛의 움직임이 빚어낸 모습이다. 적어도 그것은 의도의 산물이 아니기에 계산된 형상을 만들어낼 수가 없는 우연이 만들어낸 비정형이미지다. 매우 과학적 프로세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진이미지는 보통 예측이 가능한 결과물을 생산하지만, 이환준이 보여주는 사진들은 하나 같이 예측불허의 이미지들이기에 추상사진이 아닌 비정형이미지라 불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촬영순간에 통제를 벗어난 이미지형성의 자동생성과정은 작가의 의도나 생각들을 개입시키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상 모든 사진이미지는 그것이 추상적 형태와는 무관하게 일정부분 비정형이미지를 생산한다. 그것은 화가의 붓으로 그려진 그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진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기계적 과정의 한 특징이다. 그렇다 해서 이환준이 전혀 작업의 의도를 갖지 않았거나 작업주체로서 의식의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를 두고 빌렘 플루서는 사진가를 사진장치프로그램의 유희적 활동가로 명명한다. 이때 사진가는 일종의 게임하는 자로서 장치프로그램의 내부에 위치해서 프로그램장치가 요구하는 것에 저항하는 자다. 이때 사진가는 카메라장치프로그램이 생산하는 똑같은 다량의 잉여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비연속적 비계연적 상태의 정보를 만들어낸다. 나아가 다양한 사회 문화적 관계망에 연루된 객관적 재현활동에도 깊숙이 개입해서 의미적으로 틀지어진 계열적 관계를 절단 낸다.
이환준은 어떻게 사진처럼 보이지 않는 이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었을까? 그의 사진은 어떤 대상의 객관적 재현과정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사진이다. 사진에 나타나는 알 수 없는 패턴의 반복과 비정형의 형상들은 그림처럼 보인다. 어떤 것은 마치 옵티컬 아트를 보는 듯 하고, 또 어떤 것은 추상회화나 물감이 흩뿌려진 잭슨 폴록식의 오토마티즘 회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팝아트에 등장 할 법한 키치적인 색의 현란한 조합은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인지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겨우 몇 개의 이미지(남산타워, 혹은 물에 반짝이는 햇살이 보이는)에서 이것이 확실히 사진임을 알게 되지만, 이미 우리의 지각경험을 초월한 현상을 만나게 된다. 결국 이환준의 사진은 처음에는 그림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사진임을 알게 되는 지각혼돈경험을 하게 된다. 그림처럼 보이는 것에서 굳이 이미지의 기원을 찾지 않다가, 사진임을 확인하고 나서는 카메라에 포착된 대상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게 되는 이상한 경험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진에 대한 어떤 기대효과를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진다움이란 어떤 현실세계를 재현한 모습일 때만 가능한 것인지? 사진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된다.
이환준의 사진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을 준다. 우리는 습관처럼 사진을 현실로 착각하면서 본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일종의 착종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음을 그 망각된 감각을 깨어낸다. 그것은 사진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어도 되는 즉, 이미지의 기원을 그 대상의 근원으로 삼지 않는 이미지 그 자체로 지각되는 매우 감각적인 시각이 활성화 되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환준사진의 공간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간의 궤적을 추적하게 만드는 어떤 움직임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처음과 끝을 반복적으로 왕복하는 운동에 참여한다. 여기서 사진적 찰나의 순간은 지속공간을 만들어 낸다. 얼핏 ‘팬추램’ 즉, 공중에 빛을 발산하는 도구를 매달아 그 움직임의 물리 수학적 방정식의 법칙을 촬영한 과학적 실험의 사진들처럼 보이다가도 자세히 관찰하면 이것은 그 법칙들을 이탈하는 불규칙의 움직임에 매료된다. 이와 같은 결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이환준이 사물에서 발산되는 빛을 포착하는 방법이 불규칙한 카메라 움직임에서 기인한다. 대상의 움직임과 마주하는 비 규칙적인 움직임은 예측불허이며, 실험데이터가 불필요한 다시 재현 할 수 없는 매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무한 생성의 이미지를 낳게 된다. 이는 이제껏 사진이 만들어내는 과학적 프로그램의 일정한 데이터 값이 출력되는 장치와는 다른 결과다. 어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작업과정은 작가에게 불안한 요소이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것이다. 이환준은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면서도 매번 그 결과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그 기대치는 매우 크다. 그것은 마치 승패를 알 수 없는 게임의 규칙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환준의 사진작업은 유희공간을 창출한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사진장치가 만들어내는 유희공간이자 작가를 새로운 프로그램의 오퍼레이터로 만드는 게임의 공간이다. 그래서 인간주체의 소멸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빌렘 플루서가 그토록 사진가들에게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그 필요성을 역설했던 주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환준은 빌렘 풀루서의 이론을 실천하는 진정한 사진가다.
사진이 예술이고자 할 때 항상 따라붙는 작가의도의 산물이 이환준의 사진에서는 적용할 수가 없다. 작가가 배제된 상태를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 이것도 예술인가? 그러나 그것은 가장 사진적인 예술이다. 사진예술의 특이성은 작가의 의도를 개입할 수 없는 작가 주체의 죽음을 묵도하게 만드는 이미지다. 그러나 관객주체의 탄생을 알리는 상상의 공간을 열게 만드는 그런 이미지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진이미지에 중독 되어있는가? 사진에서 기대하는 모든 이미지는 사실상 나의 욕망의 투사이자 타자의 인정 욕망에 포섭된 그런 똑같은 잉여적 이미지는 아닌가? 그것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없는 제안된 틀의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이환준의 사진들은 매우 독특한 특이성을 가진다. 자신의 욕망이 무화되는 타자의 욕망이 침투되지 못하는 비정형의 유희공간이다. 이것은 사진프로그램에 저항하는 게임을 즐기는 행위와 같다.
이영욱(사진이미지 비평가)









이환준사진전
‘사진유희’
2016.8.12 ~ 8.30
작가와의 만남 : 2016. 8. 13 오후 3시
(사진공간 배다리 배다리전시관)
<작가노트>
현실에 숨어있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이미지
사진가가 촬영할 사물을 선택하는 것은 촬영대상인 사물을 만나야 되는데, 그 사물을 사진가는 기록하고자 하지만, 미술가는 그리려 하며, 어떤 이는 사색하고, 어떤 이는 놀이하며 즐기려고 한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사진작업은 촬영대상인 사물의 모습을 보이는 대로 기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본다’는 행위로 대상을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지만 그 대상을 기록한 사진이미지를 볼 때에는 보는 이의 시각이나 코드에 따라 현실이나 의미, 촬영기법 등에 대하여 여러모로 사유하고 해석하며 논쟁을 벌이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사진작품을 보면서 화가의 그림을 보듯 사진작품만 보지 않고 촬영된 대상을 떠올리며 의미를 찾고 해석하며 논쟁을 하게 될까? 사진의 특성상, 스스로의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회화나 음악과는 달리 사물을 찍어야 작품이 이루어짐으로 언제나 사물이라는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상의 실체와 사진을 비교분석하는 관계로 논쟁이 발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논쟁에 의문을 품으며 ‘본다’는 행위를 통해 형성된 우리의 시각적 고정관념으로 기록하는 촬영방법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방법으로 화가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카메라를 붓처럼 움직여 사진을 그려보기로 했다.
‘본다’는 행위로 보이는 대상의 모습을 촬영하였지만 카메라를 붓처럼 움직여 기록하니 사진에는 ‘본다’는 행위로 보이던 대상은 보이지 않고 그 대상에 숨어있던 전혀 새로운 그림의 사진이 찍혔다. “사진[寫眞]이란 물체의 상을 있는 그대로 박아 낸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할 때[학습백과사전], 카메라를 움직여 사물모습 속에 숨어있던 그림을 찍은 사진을 사진이라고 해도 되는지? 혼란스러워 의문도 들었지만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임으로 사진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사진과 달리 대상을 볼 때의 사물모습 속에 숨어있던 새로운 이미지라, 볼 때의 사물모습이 촬영된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임으로 어느 것이 본질이고, 현상이고, 가상인지, 헷갈렸지만, 눈으로 본 사물보다 숨어있다 촬영된 사진이미지가 더 본질이지 않을까? 의문을 품으며 눈으로 본 사물보다 더 본질 같은 사진을 찍고자 노력하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사진들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는 이미지로, 또한 사진공간속에서 회화이미지로 볼 수 있는 주관적인 사진으로, 타인들과 교감할 수 있고 보편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대인의 생활에 꼭 필요한 디지털카메라 시대에 사진공간의 작업영역을 더 넓힐 수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며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부터 이와 같은 작업을 계속하면서 기존관념에 사로잡혀있는 사진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 이 사진들은 촬영대상인 사물들을 보면서 촬영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있던 이미지임으로 이미지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사유하는 분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이환준
<서평>
사진은 비정형 유희공간이다.
이환준의 사진은 사진 같지 않은 사진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사진적인 이미지다. 그의 사진들의 특징들은 어떤 대상을 찍었지만 그 대상의 객관적 재현으로서의 의미나 구체적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회화작품처럼 추상적이다. 따라서 촬영된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그 알 수 없는 영역은 우리의 지각경험을 벗어나 있기에 매우 신비롭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만약 그 제작과정을 알게 되면 화가가 그린 추상회화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친 무엇이라 규정하기 불가능한 비정형의 이미지다.
추상회화의 시각적인 모든 것들은 화가의 의도적 산물이다. 하지만 사진의 경우 추상적 형태는 대상 자체가 이미 추상적이거나 카메라장치가 만들어내는 기술적 효과에 있다. 그것은 사진가의 의도의 산물이 아니다. 이환준의 사진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카메라 장치의 움직임과 대상이 발산하는 빛의 움직임이 빚어낸 모습이다. 적어도 그것은 의도의 산물이 아니기에 계산된 형상을 만들어낼 수가 없는 우연이 만들어낸 비정형이미지다. 매우 과학적 프로세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진이미지는 보통 예측이 가능한 결과물을 생산하지만, 이환준이 보여주는 사진들은 하나 같이 예측불허의 이미지들이기에 추상사진이 아닌 비정형이미지라 불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촬영순간에 통제를 벗어난 이미지형성의 자동생성과정은 작가의 의도나 생각들을 개입시키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상 모든 사진이미지는 그것이 추상적 형태와는 무관하게 일정부분 비정형이미지를 생산한다. 그것은 화가의 붓으로 그려진 그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진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기계적 과정의 한 특징이다. 그렇다 해서 이환준이 전혀 작업의 의도를 갖지 않았거나 작업주체로서 의식의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를 두고 빌렘 플루서는 사진가를 사진장치프로그램의 유희적 활동가로 명명한다. 이때 사진가는 일종의 게임하는 자로서 장치프로그램의 내부에 위치해서 프로그램장치가 요구하는 것에 저항하는 자다. 이때 사진가는 카메라장치프로그램이 생산하는 똑같은 다량의 잉여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비연속적 비계연적 상태의 정보를 만들어낸다. 나아가 다양한 사회 문화적 관계망에 연루된 객관적 재현활동에도 깊숙이 개입해서 의미적으로 틀지어진 계열적 관계를 절단 낸다.
이환준은 어떻게 사진처럼 보이지 않는 이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었을까? 그의 사진은 어떤 대상의 객관적 재현과정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사진이다. 사진에 나타나는 알 수 없는 패턴의 반복과 비정형의 형상들은 그림처럼 보인다. 어떤 것은 마치 옵티컬 아트를 보는 듯 하고, 또 어떤 것은 추상회화나 물감이 흩뿌려진 잭슨 폴록식의 오토마티즘 회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팝아트에 등장 할 법한 키치적인 색의 현란한 조합은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인지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겨우 몇 개의 이미지(남산타워, 혹은 물에 반짝이는 햇살이 보이는)에서 이것이 확실히 사진임을 알게 되지만, 이미 우리의 지각경험을 초월한 현상을 만나게 된다. 결국 이환준의 사진은 처음에는 그림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사진임을 알게 되는 지각혼돈경험을 하게 된다. 그림처럼 보이는 것에서 굳이 이미지의 기원을 찾지 않다가, 사진임을 확인하고 나서는 카메라에 포착된 대상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게 되는 이상한 경험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진에 대한 어떤 기대효과를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진다움이란 어떤 현실세계를 재현한 모습일 때만 가능한 것인지? 사진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된다.
이환준의 사진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을 준다. 우리는 습관처럼 사진을 현실로 착각하면서 본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일종의 착종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음을 그 망각된 감각을 깨어낸다. 그것은 사진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어도 되는 즉, 이미지의 기원을 그 대상의 근원으로 삼지 않는 이미지 그 자체로 지각되는 매우 감각적인 시각이 활성화 되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환준사진의 공간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간의 궤적을 추적하게 만드는 어떤 움직임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처음과 끝을 반복적으로 왕복하는 운동에 참여한다. 여기서 사진적 찰나의 순간은 지속공간을 만들어 낸다. 얼핏 ‘팬추램’ 즉, 공중에 빛을 발산하는 도구를 매달아 그 움직임의 물리 수학적 방정식의 법칙을 촬영한 과학적 실험의 사진들처럼 보이다가도 자세히 관찰하면 이것은 그 법칙들을 이탈하는 불규칙의 움직임에 매료된다. 이와 같은 결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이환준이 사물에서 발산되는 빛을 포착하는 방법이 불규칙한 카메라 움직임에서 기인한다. 대상의 움직임과 마주하는 비 규칙적인 움직임은 예측불허이며, 실험데이터가 불필요한 다시 재현 할 수 없는 매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무한 생성의 이미지를 낳게 된다. 이는 이제껏 사진이 만들어내는 과학적 프로그램의 일정한 데이터 값이 출력되는 장치와는 다른 결과다. 어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작업과정은 작가에게 불안한 요소이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것이다. 이환준은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면서도 매번 그 결과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그 기대치는 매우 크다. 그것은 마치 승패를 알 수 없는 게임의 규칙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환준의 사진작업은 유희공간을 창출한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사진장치가 만들어내는 유희공간이자 작가를 새로운 프로그램의 오퍼레이터로 만드는 게임의 공간이다. 그래서 인간주체의 소멸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빌렘 플루서가 그토록 사진가들에게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그 필요성을 역설했던 주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환준은 빌렘 풀루서의 이론을 실천하는 진정한 사진가다.
사진이 예술이고자 할 때 항상 따라붙는 작가의도의 산물이 이환준의 사진에서는 적용할 수가 없다. 작가가 배제된 상태를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 이것도 예술인가? 그러나 그것은 가장 사진적인 예술이다. 사진예술의 특이성은 작가의 의도를 개입할 수 없는 작가 주체의 죽음을 묵도하게 만드는 이미지다. 그러나 관객주체의 탄생을 알리는 상상의 공간을 열게 만드는 그런 이미지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진이미지에 중독 되어있는가? 사진에서 기대하는 모든 이미지는 사실상 나의 욕망의 투사이자 타자의 인정 욕망에 포섭된 그런 똑같은 잉여적 이미지는 아닌가? 그것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없는 제안된 틀의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이환준의 사진들은 매우 독특한 특이성을 가진다. 자신의 욕망이 무화되는 타자의 욕망이 침투되지 못하는 비정형의 유희공간이다. 이것은 사진프로그램에 저항하는 게임을 즐기는 행위와 같다.
이영욱(사진이미지 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