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집현전 전시안내

집현전 전시안내

전시안내

임기성사진전 '존재와 부재' 2013. 9. 27 ~ 10. 9.

2013-09-20
조회수 11943

07780007 copy-.jpg

 

 

임기성사진전

 

'존재와 부재'

 

2013. 9. 27 ~ 10. 9. 

 

 

 은유와 환유의 거리(일부) 

                                                         유봉희(문학박사, 인하대 인문학부 강사)

 

“잘 사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가장 잘 대처하는 길”이라는 뜻으로 족히 받아들였다.

이런 나에게 죽음은 늘 은유의 대상이었으되 동일시할 수 없는 불구의 은유, 바로 그것이었다.

 

공자를 인용했지만 불구란 이미 치명적 상처를 걷어내기란 쉽지가 않은 것이다.

차라리 ‘파탄난 은유’란 말이 적실할 터였다. 임기성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았던 것일까?

은유(metaphor)와 환유(metonymy)로 구분 할 때 그의 사진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염습(殮襲)한 시신 위 벽에 시계처럼 보이는 그 무엇이 있다. 수의를 입히는 습(襲) 가운데 손 하나가 보인다.

시신을 깨끗이 닦는 염(殮)하기 전 시신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전 발가벗겨진 시신의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나타난다.

넘버링이 된 시신이 안치실로 들어가는 장면. 이것으로 끝이다.

 

주위에 그 어떤 사람의 흔적도 없다. 오로지 흑백의 모노크롬화 한 시신만이 다가온다. 특히 고감도의 필름으로 찍어 시신들은 모래를 뿌려 놓은 듯 더욱 고요하게 다가온다. 침묵과 객관, 냉철, 이성, 절제의 태도다.

 

전체 분위기가 그래서 차갑게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죽음의 이미지를 조작하지 않은 채 즉물적으로 대응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작가는 철저히 죽음의 단상들을 외면하고 있다.

 

그 단상들은 오로지 관람객의 몫이 된다. 나는 여기서 단절의 공포를 느꼈다.

사진 속 시신과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통의 창은 없다. 그저 시신을 바라보는 행위만이 가능하다.

침묵과 정지와 별리(別離)를 목도한다. 사라짐이고 흔적 없음이다. 구도도 대칭적이다.

아래와 위, 안과 밖, 수평과 수직,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계산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계산을 따져볼 수밖에, 수지타산이 되는 것일까? 이것이 안 될 때, 작품의 객관성 획득은 요령부득이 될 터다.

 

결론적으로 임기성의 이번 사진은 수지타산에서 반타작이다. 죽음은 단절이고 흔적 없음임을 관람객에게 각인시키면서 그들을 침묵의 공포 속으로 모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관람객은 자신의 미래와 마주하게 된다. 누구는 지나온 삶을 반성할 것이고, 누구는 삶의 허무함을 조롱할 것이다.

조금만 어깨와 눈을 풀고 응시했다면 소통의 창을 열 수가 있었을 터인데 여기서 끝인 것이 내내 아쉽게 다가온다.

 

 

 

임 기 성

              1963. 인천출생

              인천시 동구 송림동 222-4번지

              kisung4743@hanmail.net

              010.2706.1266

 

    개 인 전

              2001    밤의 미행 하우아트 갤러리.서울

              2008    밤의 미행2 갤러리 폭스.인천

    단 체 전  

              2013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브제 사진공간 배다리

              2013    신세계 갤러리 인천은 항구다 전

              2012    인천을 보다 동네방네 인천사진아카이브 프로젝트,부평아트센터,인천

              2011    3인3색전 가온 갤러리

              2011    사진프로젝트 얼굴,부평아트센터, 인천

              2010~2008 사람과 사람 4회 단체전 인천

              2003    신체적 풍경전 제3회 인천미디어아트비엔날레,예총문화회관,인천

              2002    부재의 풍경들, 스페이스 갤러리,서울

 

    출    판  

              2012    인천을 보다, 동네방네 인천 사진아카이브, 출판사 물과해

              2011    인천 문화바우처기획 기획사업 사진프로젝트 얼굴

              2002    부재의 풍경들 출판사 푸른세상  

               

 

07780008 copy.jpg 

 

07780004--.jpg 

 

07780006 copy.jpg

 

 

은유와 환유의 거리(전문)

 

유봉희(문학박사, 인하대 인문학부 강사)

 

임기성을 만난 것은 지난해 여름 이맘쯤일 게다. 첫 만남에 결이 고운 사람이란 걸 알아차렸다. 겸손하기도 했다. 그간 살아 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남 진주 생이지만 세 살 적부터 지금까지 인천에서 산 것이고 보면, ‘인천사람’이다. 지난 1987년 부평 대우자동차에 입사하면서 그의 사진은 시작한다. 회사 아마추어 사진 동아리 가입이 그것이다. 그 후 서울 남산 ‘서울사진센터’에서 전문가 양성 코스를 거치면서 임기성 나름의 사진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1993년 대우자동차 퇴사 이후부터는 오로지 사진만으로 밥을 먹었다. 웨딩사진 등 ‘돈 되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작업만은 놓지 않았다. 그는 이른바 ‘공모전’ 사진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것은 ‘작가’이기를 고집하는 임기성 자신의 각오이기도 한 것이다. 허방의 다리 같은 알량한 이름을 얻기보다는 작가이고 싶었던 터이다.

 

L의 사진 속엔 지난 시간들 속 어스름 새벽과 침묵하는 무덤과 침묵하는 그리움과 그것들이 만들 어 준 엄청난 분량의 상념이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섭니다.-2011. 9. 23, 당신의 안해 심양미 글 중에서.

 

임기성의 ‘안해’(‘안의 해’란 얼마나 살 갓진 표현이던가!)의 말처럼 이러구러 뚜벅뚜벅 그는 그렇게 사진의 길을 쉬지 않고 갔던 것이다. 이번이 세 번째 개인전이다. 죽음을 화두로 던지고 있다. 쉽지 않은 주제일 터이다. 죽음의 도상학(圖像學)은 길고도 긴 시간의 축적을 지니고 있다. 멀리 알타미라 동굴벽화(지금은 그것이 어찌 산 것들일까)와 예수의 ‘최후의 만찬’ 등은 이미 죽음을 암시하는 도상들이었다. 지금은 가히 죽음의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시대라 할 만하다. 지구촌 곳곳에선 죽음의 족보들이 신문지처럼 나뒹굴고 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즉 이문목도(耳聞目睹)의 상황들이다. 그것들이 연출하는 이미지들 속에 우리는 풍덩 빠져 있는 것이다. 각종 매체에 실린 살육의 현장과 인간을 질식하게 할 것 같은 저 자본의 강력한 이미지들······. 사진예술은 태생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고 보면, 자본과 전쟁이 조작한 죽음의 도상학을 떠받치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

지난 2004년 6월 21일 새벽 아랍 위성방성 알자지라 TV에 등장한 김선일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교회의 명령에 따라 다른 민족·다른 종교의 땅, 죽음의 그곳 이라크로 갔던 것이다. 이 화면 앞에서 그저 콜라병을 핥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모습이 겹쳤다. “땅 끝까지 팔라”는 전 지구적 자본의 상징 ‘코카콜라’의 공략과 기독교의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동시적이었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콜라병은 과연 생명수였을까? 김선일과 그들을 동시에 떠올리는 것을 반어(反語, irony)적 포즈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렇듯 매일 매일을 죽음의 도상 속에서 살고 있다. 육체가 사라져야 죽음인가, 목숨이 붙어 있어야 산 것인가. 저녁마다 대한민국 도심 속에 붉은 점을 찍듯 솟아나는 십자가들은 부활과 생명의 표상들일까? 우리는 죽음의 도상들을 하나씩 밟으면서 하루를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이미 일상화되어 낯설지 않은 전쟁터의 주검들을 지나치듯 말이다.

임기성의 이번 전시가 궁금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다. 이미 낯설지 않은 주제가 되어버린 죽음을 그는 어떻게 화면에 담았을까? 죽음은 모든 예술의 영원한 화두인가! 사진예술에서 죽음의 기호와 이미지는 우리에게 내면화 단계를 지나 무감각 내지는 무화되어버린 상태는 아닐까? 여기서 죽음을 이미지로 환기시킨다는 것은 어떤 값어치를 얻는 일일까? 죽음의 다큐멘터리는 가능한 것일까? 질문은 계속 이어지면서 그의 작품을 보고 또 보았다. 그래서 그의 전시는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공자는 죽음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작가는 자신이 던진 화두에 대해 한 마디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작가다. 한 방이 없다면, 이 앞에서 주저한다면 작가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으리요.” 다시 “감히 죽음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요.” (季路 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 生 焉知死)

 

“잘 사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가장 잘 대처하는 길”이라는 뜻으로 족히 받아들였다. 이런 나에게 죽음은 늘 은유의 대상이었으되 동일시할 수 없는 불구의 은유, 바로 그것이었다. 공자를 인용했지만 불구란 이미 치명적 상처를 걷어내기란 쉽지가 않은 것이다. 차라리 ‘파탄난 은유’란 말이 적실할 터였다. 임기성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았던 것일까? 은유(metaphor)와 환유(metonymy)로 구분 할 때 그의 사진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염습(殮襲)한 시신 위 벽에 시계처럼 보이는 그 무엇이 있다. 수의를 입히는 습(襲) 가운데 손 하나가 보인다. 시신을 깨끗이 닦는 염(殮)하기 전 시신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전 발가벗겨진 시신의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나타난다. 넘버링이 된 시신이 안치실로 들어가는 장면. 이것으로 끝이다. 주위에 그 어떤 사람의 흔적도 없다. 오로지 흑백의 모노크롬화 한 시신만이 다가온다. 특히 고감도의 필름으로 찍어 시신들은 모래를 뿌려 놓은 듯 더욱 고요하게 다가온다. 침묵과 객관, 냉철, 이성, 절제의 태도다. 전체 분위기가 그래서 차갑게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죽음의 이미지를 조작하지 않은 채 즉물적으로 대응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작가는 철저히 죽음의 단상들을 외면하고 있다. 그 단상들은 오로지 관람객의 몫이 된다. 나는 여기서 단절의 공포를 느꼈다. 사진 속 시신과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통의 창은 없다. 그저 시신을 바라보는 행위만이 가능하다. 침묵과 정지와 별리(別離)를 목도한다. 사라짐이고 흔적 없음이다. 구도도 대칭적이다. 아래와 위, 안과 밖, 수평과 수직,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계산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계산을 따져볼 수밖에, 수지타산이 되는 것일까? 이것이 안 될 때, 작품의 객관성 획득은 요령부득이 될 터다. 결론적으로 임기성의 이번 사진은 수지타산에서 반타작이다. 죽음은 단절이고 흔적 없음임을 관람객에게 각인시키면서 그들을 침묵의 공포 속으로 모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관람객은 자신의 미래와 마주하게 된다. 누구는 지나온 삶을 반성할 것이고, 누구는 삶의 허무함을 조롱할 것이다. 조금만 어깨와 눈을 풀고 응시했다면 소통의 창을 열 수가 있었을 터인데 여기서 끝인 것이 내내 아쉽게 다가온다.

장면을 전환해보자. 지난 2011년(9.23-29,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가온갤러리) 개최한 그의 전시「그리움」이다. 개인적 기호일 수 있겠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보다 나는 이 전시 출품작들을 더욱 좋아한다. 이 작품들 또한 죽음을 화두로 던지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모두가 무덤과 비석, 그리고 산 자들의 헌화와 추모의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은유의 세계가 장엄하게 다가왔다. 솔직한 표현이다. 은유의 세계란 무릇 다가갈 수 있고, 소통할 수 있고, 동일시할 수 있고, 뽀뽀할 수 있고, 그곳으로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을 의미한다. 환유는 교환가치로 전환되는, 〮〮보완적이고 대체적이고 목적적인 전이(轉移)일 뿐이다. 여기에는 매개체가 필요할 뿐이다. 환유의 세계란 늘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식 한 번 떨어보자. 은유의 어원은 그리스어 ‘metaphora’에서 유래했다. 이 때, ‘meta’의 의미는 ‘무엇을 넘어서’, ‘무엇과 더불어’ 또는 ‘무엇을 향해서’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phora’는 ‘pherein’에서 온 말로, ‘가지고 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환유는 ‘meta change’와 ‘onoma name’에서 연유한 그리스어 ‘metonymia’에서 유래했다. 그 본디 뜻과 기능은 한 사물의 이름이 그와 관련이 있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도록, 내포 의미를 전이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환유의 세계는 그래서 인위적이고 기계적이다.

임기성의 사진은 여기서 은유와 환유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이다.「그리움」이 은유의 길이었다면, 이번 길은 환유의 세계다. 여기서는 장소성(placeness)을 읽을 수가 없다. 장소성은 과연 무엇인가? 장소(place)는 어떤 특정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場), 또는 그 활동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배경을 말하는 것이라면, 장소성은 그 특정한 장소에서 생활하는 구성원들이 지니게 되는 장소에 대한 사회적 의식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 장소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주체성의 확인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는 일상이 짙게 배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움」의 세계에서는 ‘죽음의 일상’이 덤덤하게 놓여 있다. 모두가 스냅사진인 것도 남달랐다. 변화하는 장면을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재빨리 촬영하여 기록한 사진인 것이고 보면 일상이 그렇듯 무덤조차도 낯설지가 않다. 죽음의 일상성은 오히려 산 자들의 몫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나와 너, 죽은 자와 산 자, 안과 밖의 경계는 무너져 버린다. 근대 문명론의 이중성은 육체/마음, 물질/정신, 자연/인간을 분리한 데서 그 병리적 발생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나와 타자,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나와 그것으로 설정한 것에 기초한 목적 지향적 의식으로 나타난다.

내가 환유의 세계를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서 발원한다. 결국 나에게 있어 타자와 그것은 나를 위한 통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토대를 새로운 인식론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임기성 사진에 주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질에서 마음이 배제되지 않은, 마음의 원래 자리를 회복한 새로운 인식론을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하자는 것이다. 인류 문명이 당면한 모든 문제는 타자에 대해 잘못 설정된 인식, 즉 이해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에 대한 해법은 생태학적 인식, 즉 모든 것이 서로 관계되어 있다는 인식, 이 패턴이야말로 마음, 즉 살아 있음의 정수라 생각한다. 이중성과 편향성, 탈이성(이성의 도구주의), 비감성화는 여기서 탈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에 전시하는 임기성의 작품들은 철저히 구성주의적이다. 다양한 구성주의 이념들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목적의식적인 통제·자생적으로 형성된 제도의 중요성 무시·오로지 언어로 표현된 지식만을 강조·오로지 증명된 지식만을 강조.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되돌려 보고프다. 인위적인 것 대신에 자생성 강조·목적합리성 대신에 가치합리성 강조·암묵적 지식의 강조·증명되지 않은 지식의 강조. 그런 의미에서 나는 탈 경계론자이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글이 객관적이지 않고 다분히 주관적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임기성의 이번 작품들은 경계선이 분명하다. 시신과 그 주변은 하나의 경계다. 경계는 ‘나’와 ‘타자’, ‘안’과 ‘밖’,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구분한다. 임기성의 사진은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경계선 위에 있는 존재, 즉 경계인은 늘 정신적으로 흔들리게 마련이다. 그 정신적 흔들림을 안과 밖, 자신의 모습에 빗대어 가시화시킨다.

이 가시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계는 임기성 스스로 구분한 것이 아닌, 강제된 것. 이 강제된 경계의 구조 속에 임기성이 어떻게 편입되는지를 살필 때, 이 경계는 나름의 의미를 얻는다. 병원 시신 안치실 안의 세계는 형체가 있는 뚜렷한 ‘가시(可視)’의 영역이다. 이것은 인식 주체에게 선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밖의 영역. 이 밖의 영역은 임기성의 총체적 경험의 세계를 의미한다. 밖의 세계가 없다. 공허하고 허탈하고, 덧없다. 죽음은 과연 그런 것일까? 그저 바라보는 대상일 뿐인가? 임기성의 이번 사진은 ‘가시’와 ‘비가시(非可視)’ 영역의 혼재성이 없다. 안과 밖, 즉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영원한 침묵이고 고별일까? 이번 임기성 사진의 내러티브는 위계질서와 선형적 구조에 갇힌 환유의 세계다. 여기에서 탈피해 소통하고 꿈꾸는 은유의 세계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가치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연속적인 체계로 해석하는 우리의 전통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氣)와 도(道)가 있을 터인데, 기는 만물을 낳는 생명의 에너지, 그 기가 어떻게 취산(聚散)·화생(化生)하는 가에 따라 식물과 동물, 사람 등 만물의 형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강조하지만 이것은 17세기 데카르트가 고안한 기계론적 사유체계와는 확실히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친구 임기성! 우리, 은유의 세계를 공유해 보자구나. 나는 글로 너는 사진으로.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산 자들의 미래인 것을. 나는 임기성의 사진을 사랑할 것이다. 그에게는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